바이샤오옌 유괴살해사건
 

바이샤오옌 유괴살해사건

1. 사건개요

1997년 4월 연예인 바이빙빙의 딸 바오샤오옌이 납치된 후 고문 끝에 살해된 사건으로 일본의 콘크리트 살인사건에 버금가는 끔찍한 살인사건 입니다. 유괴에는 여러 사건이 있지만 유괴 후 몸값을 받아내려고 하다가 살해하거나 몸값을 받고 살해하는 등 대부분의 유괴사건은 유괴▶ 살해 ▶사체유기 순으로 이루어지는 게 기본이지요. 하지만 이 사건은 살해이전 집단성폭행과 끔찍한 고문이 동반된 유례없는 범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만의 바이빙빙은 대만드라마 칠협오의에 출현한 배우로 고스트 메리, 쿵푸 키즈 등에 주연으로 나와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1997년에도 주연배우로 <너와 나의 것>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지만 1997년 4월 14일 그녀의 딸이 유괴당하면서 극악무도한 범죄의 피해자가 됩니다.

2. 납치경위

(모)바이빙빙과 (녀)바이샤오옌

1997년 4월 14일 바이빙빙의 딸 바이샤오옌은 평소처럼 등교를 하던 중 납치됐습니다. 납치범의 행각이 대개 그렇듯이 이들은 평소 바이샤오옌의 하루 일과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이샤오옌은 유명 연예인의 딸로서 TV예능과 드라마에 간간히 출연했지만 남들과 똑같이 등교했고 수행원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딸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게 했을까요. 납치범은 대낮에 바이샤오옌을 납치해 차량에 태웠습니다. 납치장소는 집에서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그날 지각을 해 등굣길이 한산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계속 그녀를 관찰하다가 혼자 있는 순간을 포착했을 것이고 찰나에 범행을 저지를 기회를 엿보았을 것입니다. 납치범들은 유괴직후 바이샤오옌을 집단강간하고 새끼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때 그녀는 고작 16살이었습니다.

3. 협박

납치범들은 바이샤오옌의 나체사진을 찍은 뒤 바이빙빙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창껑 골프장 옆 공동묘지에 선물이 있으니 딸을 살리고 싶으면 확인해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이빙빙은 곧장 학교에 전화를 걸었는데 오늘 딸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충격에 빠진 바이빙빙은 이후 골프장 옆 공동묘지로 갔고 거기엔 딸의 새끼손가락, 나체사진과 함께 협박으로 쓴 "엄마, 저 납치됐어요. 지금 많이 아파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오래된 지폐로 500만 달러가 필요해. 경찰에 신고하면 제 목숨이 끊어질 거예요"라는 딸의 편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4. 사건전개 및 살해

이혼 후 중년에 들어서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딸을 위해 못할 것이 있었을까요. 바이빙빙은 곧 60억에 달하는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도 했습니다. 이후 유괴범들은 바이빙빙에게 전화를 걸어 돈이 준비됐는지 확인했고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딸의 생존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러면 유괴범들은 통화로 바이샤오옌에게 당일 신문을 읽게 하며 생존여부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딸의 유괴 3일 후 돈을 준비한 바이빙빙은 유괴범들과 약속을 잡고 택시기사로 위장한 경찰과 함께 범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녀는 유괴범들과 타이베이시, 네이후구 등 장소를 바꿔가며 약속을 잡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딸도, 유괴범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바이빙빙의 집을 찍고있는 기자들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항상 납치범을 잡기 위한 경찰과 함께 대만 톱배우 딸의 납치라는 특종을 잡기 위한 기자들로 붐볐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가 경찰에 딸의 범죄피해 사실을 알린 직후 대성보《大成報》와 중화일보《中華日報》에 수사내용이 흘러들어 갔고 이들은 바이샤오옌의 납치소식을 선제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바이빙빙의 항의로 다음 날 새벽 인쇄를 중단시키고 발행된 신문을 모두 회수했습니다만 이 일로 더 이상 경찰의 비밀수사는 기자들에게 비밀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본인들의 범죄장면을 생중계하고 싶은 범죄자는 없습니다. 기자들은 경찰에 신고가 접수된 시점부터 바이빙빙의 집 근처부터 그녀를 미행했고 기자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그녀와 거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한 모녀의 끔찍한 비극이 기자들에게는 자극적인 기사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몇 번의 만남이 불발된 4월 25일 그녀는 납치범을 만나기 위해 타오위엔시의 한 체육관으로 이동합니다. 납치범을 기다리던 바이빙빙은 경찰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바이빙빙이 그토록 기다리던 전화였습니다. 납치범이 검거됐다는 것이었죠. 경찰은 통신수사 끝에 10개 이상의 통신내역, 납치범들의 신원도 파악했고 이를 토대로 납치범들의 아지트를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바이빙빙은 딸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갔지만 딸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경찰이 납치극의 공범 중 3명을 체포했지만 주범을 놓쳤고 체포된 이들마저 바이샤오옌의 소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사실 그 시점 바이빙빙의 딸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습니다. 몸값을 받는데 실패했던 납치범들이 4월 18일 이미 바이샤오옌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한번 바이샤오옌을 집단강간하고 폭행했으며 머리카락을 모두 쥐어뜯고 귀에 폭죽을 넣어 고막을 망가뜨렸으며 40개가 넘는 못을 먹이는 등 엽기적인 고문과 함께 그녀를 교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바이빙빙은 4월 26일 공개 기자회견을 시작했습니다. 바이빙빙은 "딸은 무력한 아이입니다. 제발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라며 기자들에게 빌었습니다. 제발 취재를 그만하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4월 28일 신베이시 타이산 구의 하수도에서 바이샤오옌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당시 바이샤오옌의 시신은 늑골이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어 사람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어머니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때도 중국시보《中國時報》기자는 피해자의 시체 사진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게시해 대만의 기자 수준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바이샤오옌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합니다. 인질이 없어진 것도 이유였지만 경찰의 무능함, 기자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대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5월부터 대규모 군중시위가 계속되었고 이 시기 정부의 안전보장과 치안에 대해 신뢰하는 국민은 10%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리덩후이 총통은 현상금과 함께 범인을 잡되 저항하면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5. 검거 및 총격전

시위대는 총통관저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認錯: 잘못을 인정하라

또한 경찰의 대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납치범들에게 내부전화가 도청당했으며 경찰끼리 서로의 전화를 도청하고 경찰국장이 첸진싱, 린춘성, 가오티안의 여죄를 은폐하려 한 혐의가 밝혀졌습니다. 시체 발견 후 3개월이 다 된 8월 19일, 수사망을 좁혀오던 경찰은 범인들이 타이베이 우창거리에서 밀항을 위해 업자와 만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범인들을 급습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폭로에 따르면, 서둘러 현장에 도착한다고 많은 이들이 총기와 탄약을 챙기지 못했고 일부 기자들이 봉쇄선에 침입해 현장관리에 혼란이 와 린춘성이 피격 후 자살하고 가오티안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10월 23일 첸진싱, 가오티안은 타이베이시의 성형외과에 난입해 의사를 협박한 다음 성형수술을 받고 의사부부와 간호사를 살해합니다. 11월 5일 첸진싱은 일간지 연합보《联合报》에 자신의 아내가 검거된 것에 불만을 품고 "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말라! 정의를 되찾겠다 사회에 복수할 것"이라는 투서를 보냅니다. 남을 죽이는 것은 유희거리로 여기면서 본인 가족은 절절히 아끼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1월 17일 가오티안은 타이베이시 시파이 인근 지압마사지 가게에서 경찰에게 습격당해 총격전 후 자살했습니다. 11월 18일 첸진싱은 대만 주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 맥길 알렉산더(McGill Alexander)의 집에 침입하여 남아공 장교 주오웨이와 그의 아내, 딸 2명 아들 1명 총 5명을 인질로 삼고 이후 사법 박해를 받았다며 기자들과 전화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인터뷰는 TVBS, EBC 등 언론을 돌아가며 장장 8시간이 계속되었고 이 시간 동안 경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첸진싱에게 언제 자살할 것이냐고 묻는 등 시덥잖은 대화가 끝나고 경찰은 첸진싱의 아내를 구치소에서 데려와 공세를 펼쳤습니다. 그의 아내 장소진을 관저에 들여보내고 대신 가장 어린 인질인 7개월 남아를 데려나왔습니다. 이후 첸진싱의 어머니가 첸진싱의 아이를 데리고 관저에 들어와 첸진싱을 만난고 30분 후에 떠났습니다. 대만 민국당의 변호사는 첸진싱에게 그의 가족을 변호하고 그들이 거주지에 돌아갔다는 것을 확인해주었고 첸진싱은 12세의 소녀 크리스틴을 풀어주었습니다. 19일 첸진싱은 드디어 인질을 모두 석방하고 스스로 경찰차에 올랐습니다

검거되는 첸진싱

법정에서 그는 바이샤오옌 납치 살인 등 최소 19건에 대한 처벌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첸진싱은 다른 중대사건과의 관련성 때문에 사형이 미뤄지다가 1999년 10월 6일 총살형으로 삶을 끝냅니다. 바이빙빙은 첸진싱의 처남 장지후이가 무죄인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고 하는데 이후 첸진싱의 아내는 매춘업소에서 일했으며 그의 자식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당시 무죄를 받았던 처남 장지후이는 2005년 11월 25일 여자친구 강간·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