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 미제살인사건
 

개구리 소년 미제살인사건

1. 사건개요 및 실종경위

1991년 3월 26일 대구 성서초등학교를 다니던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향한 후 실종된 사건으로 장기미제 사건이다. 와룡산은 대구 달서구에 있는 300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인데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수집하러 간다고 나가서 실종된 것이다. 이날은 공휴일이었고 가장 나이가 많은 우철원(13세)과 4명은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갔다. 아이들과 같이 있었지만 산에는 따라가지 않은 김태룡, 올라가다 만난 형, 동네 아주머니 모두 아이들에게 도롱뇽 알을 구하러 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산에 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종아동을 찾는 포스터


그런데 저녁이 되어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와룡산은 동네 뒷 산이었지만 초등학생들이 어두울 때까지 들어오지 않자 부모들도 걱정이 되어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새벽까지 경찰들과 찾아다녔지만 아이들은 발견할 수 없었는데 무려 아동 5명이 동시에 실종된 사건은 당연하게도 언론을 통해 대통령에게까지 알려졌다. 달서군 경찰서는 사건발생 일주일째까지 이 사건을 집단가출로 처리 했지만 이미 8회에 걸쳐 550명이 수색에 동원되었음을 짐작한다면 당시 경찰이 실종사건을 가볍게 생각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종아동에 대한 포스터를 뿌리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지시 이후 와룡산 실종 장소 근처를 40여 회나 뒤졌고, 지역주민 수천 명에게 탐문 조사를 진행했다. 5년 동안 경찰인력이 30만 명이나 동원되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와룡산 실종사건의 공식적인 수색은 중단되었고 상당한 보상금이 걸린 채 작은 수사만 계속되고 있었다.

김종식 군 집을 허물고 있다

이 와중에 카이스트에 재직중이던 범죄심리학자는 실종된 김종식군(9세)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이고 집에 암매장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김종식 군의 집 화장실과 안채 뒷방을 헐었으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음) 이후 아들을 찾지 못힌 김종식 군의 아버지는 10년도 더 살지못하고 사망했다. 아마 스트레스가 컸던 모양.

시민들의 허위신고도 잦았고 경찰은 주요 협박전화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등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치정, 금품, 원한 등을 범죄목적보고 탐문수사에 집중했으며 이유없는 범죄에 대한 매뉴얼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성서초등학교 학생 5명이 실종된 사건은 장기미제로 빠지게 된다.

개구리 소년 제보를 원하는 포스터

2. 시체 발견과 의문점들

2002년에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들어간 등산객이었고 유골은 와룡산 중턱에 묻혀있었다. 그런데 경찰의 삽질이 다시 시작됐다. 경찰은 처음 4명의 시신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는데 개구리 소년 유족들은 보도자료에 따르면 경찰이 곡갱이와 삽으로 유해 발굴을 진행하여 현장이 훼손되었으며 감식반이 도착했을 때 이미 4구의 유골은 손상되었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경찰은 아이들의 사인을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하여 공분을 샀다(이후 경북대 법의학 팀이 타살로 결정)

(좌)발견 당시 모습 (우)유해 발굴과정

초등학생들에게 늦은 밤의 산은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뒷 산은 낮은 높이에 아이들이 잘 아는 곳이었고 주변에 고속도로 불빛도 있었다. 그런데도 길을 잃어 죽었다는 식의 결론을 냈으니 국민들이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북대 법의학팀이 종합해 낸 사인은 둔기 혹은 흉기에 의한 타살이었다. 특히 가장 나이가 많았던 13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25차례 손상, 좌측 두정부(뒤통수) 함몰 및 골절 등 둔기로 수차례 가격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이 상처를 미국 법의학 전문가에게 의뢰했고 소년이 살아있을 때 생긴 것으로 판단됐다.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를 예리한 흉기로 찌르면 찔린 사람은 머리를 움직이는 등 반응을 하기 때문에 상처가 일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썼는지 ‘살아있는’ 소년의 머리에 규칙적인 상처를 10여곳이나 냈다. 범인들이 다수였고 두 사람 이상이 소년을 붙잡고 머리를 가격했다면 가능할 수 있다.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은 이외에도 수많은 의혹이 존재한다. 300m 정도되는 작은 산에 수만명을 동원했음에도 10년 후에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5명의 아이들이 모두 사망했고 아이들이 마을을 보고 있는 산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이들을 살해하고 반대편으로 가 유기했다기 보다는 아이들을 마을이 안 보이는 반대편 산으로 유인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다.

미제사건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추측이 있었는데 와룡산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간첩의 짓이다, 근처 공고생 일진무리다 라는 추측이 있지만 말 그대로 추측일 뿐 아무 근거도 없다. 이전부터 제기되는 의혹은 군부대에서 오발이 있었고 한 아이가 오발로 죽자 입막음을 위해 모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신에서 총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 가설역시 근거가 없다. 게다가 군의 명령체계로 보건데 오발로 인한 입막음으로 4명을 연속살해하는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인근 부대의 당일보고에는 사격훈련이 없으며 최후방에 해당하는 대구에서 경계근무에 실탄이라도 지급했다는 것일까. 군대에 갔다 왔다면 공포탄 만으로도 산을 울리게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약 오발이 있었다면 마을 주민들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3~4학년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산에서 기다리는 상황도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다 5명의 아이들을 상대로 동시에 보복범죄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보복 범죄자들은 대개 범죄대상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만약 부모에 대한 증오로 범죄를 계획했다면 특정 아동이 등하교할 때를 노리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인데 뭐하러 산까지 따라가서 범행을 한다는 것인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범인(들)과 아이들은 우연히 만났고 5명을 모두 죽여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정도가 아닐까. 만남 자체가 우연이라면 범인은 평소 살인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던 잠재적 범죄자거나 이미 살인경험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장에서 발견된 묶인 옷

이전에 버니어캘리퍼스와 관련해 공고생 일진무리라는 글이 떠돌았는데 범인들이 정말 일진 무리였다면 아이들을 결박할 이유가 없다. 다수의 일진무리가 뭐하러 9살, 10살 정도되는 아이들을 상대로 결박할까? 결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해자를 구속할 자신이 없을 때 하는 것이다. 성인도 아닌 10살 아이를 결박해야한다면 그것은 단독범 혹은 5명의 아이들을 자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개구리 소년 살인사건 수많은 사람들의 수사, 추측, 프로파일링에도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하고 2006년 3월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지금은 범인을 잡아도 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